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흥제 전투 (문단 편집) == 배경: [[사마사]]와의 대결 == 251년, [[고평릉 사변]]으로 [[위나라]]를 휘어잡은 태부 [[사마의]]의 죽음으로 장남 [[사마사]]는 [[대장군]]으로 승진하여 [[사마|사마씨]]의 대권을 승계했다. 공교롭게도 위나라의 2세대 사마씨인 사마사가 권력을 물려받은 시점에 오나라의 2세대 [[제갈|제갈씨]]인 [[제갈각]]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격이었다. 두 권신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았다. 둘 다 황제 다음 가는 높은 직위에 오른 건 물론 [[사마의]]와 [[제갈근]]이라는 각국의 거물을 아버지로 두고 있으며, 동생으로 각각 [[사마소]], [[제갈융]]이 있었다. 하지만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권력을 물려받은 셈인 사마사와는 달리, 제갈각은 6년 연상이긴 해도 스스로 여러 공적을 세워 그 자리에 올랐다. 『[[진서]]』 「경제기」와『[[정사 삼국지|삼국지]]』 「제갈각전」을 비교해봐도 제갈각은 대권에 오르기 전부터 신동 일화 외에도 여러 군사적 / 정치적 활약을 기록한 반면 사마사의 첫번째 활약이자 유일한 군공은 [[쿠데타]]인 [[고평릉 사변]]이었다. 어디까지나 탁고 [[대신]]으로 어린 [[손량]]을 보좌했고 [[손준]] 등 견제세력도 있었던 제갈각과는 달리 [[사마사]]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기에 훨씬 권세가 강했지만, 사실 완벽한 건 아니어서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한 [[조방]]이 훗날 [[하후현]] 등과 [[친위 쿠데타]]를 획책하는 등 이래저래 불안정하긴 했다. 이러한 권력의 취약함 덕분에 두 2세대 권신들은 결국 권위를 굳건히 세워줄 뛰어난 업적을 세우는데 여념없게 되었다. 이러한 상황에서 오의 제갈각과 위의 사마사가 맞붙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였다. >제갈각은 건흥 원년(252년) 10월, 동흥에 사람들을 모아 다시 큰 제방을 만들어 왼쪽과 오른쪽은 산으로 이어지고, 그 제방을 낀 형태로 두 성을 쌓았다. >---- >『삼국지』 「제갈각전」 첫번째 도발은 제갈각의 몫이었다. __'''제갈각은 동흥제의 재축조를 명했다.'''__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